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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와 예술의 만남

도예가 알려준 ‘비워내기’의 미학

by 다정한스푼 2025. 7. 20.

 

도자기는 속을 비워야만 제 기능을 합니다. 이 단순한 구조는 도예의 원리인 동시에, 인생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깊은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도자기의 제작 과정에서 ‘비움’이 왜 중요한지, 비워야 비로소 담을 수 있다는 조형적 철학이 어떻게 우리의 일상과 정신에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봅니다. 도예 초보자부터 예술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까지 ‘비워내기’의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인사이트를 제공합니다.

화이트 꽃병
화이트 꽃병 이미지

이미지 출처- pixabay

비워야만 그릇이 되는 이유

도자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가장 의아해하는 점 중 하나는 “속이 비어 있는데 왜 이렇게 단단할까?”라는 질문입니다. 사실 도자기의 본질은 바로 그 ‘빈 공간’에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형태라도 안이 꽉 막혀 있다면 그것은 그릇이 아니라 조형물일 뿐입니다. 도자기는 무엇인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며, 그 담는 능력은 곧 ‘비워진 상태’에서 비롯됩니다. 이 개념은 단순한 구조적 특성을 넘어서, 도예를 하는 사람에게 하나의 철학이 되기도 합니다. 흙을 쌓고, 중심을 잡고, 안을 파내는 과정 속에서 도예가는 ‘형태’뿐 아니라 ‘여백’을 의식하게 됩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여도, 그 속은 정갈하게 비어 있어야 비로소 물을 담고, 차를 우려내고, 꽃을 꽂을 수 있는 진짜 그릇이 됩니다. 이 글에서는 도자기 제작 과정에서 비워내기가 어떤 기능적, 철학적 의미를 가지는지 알아보고, 그 미학이 현대인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 수 있을지 생각해보려 합니다.

‘비워냄’이 가진 실용성과 철학

1. 기능적 완성을 위한 ‘내부 공간’
도자기의 핵심은 겉모양보다 안쪽 공간입니다. 컵이라면 음료를 담아야 하고, 화병이라면 줄기를 넣어야 하며, 항아리라면 긴 시간 내용물을 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겉을 두껍게 만드는 것보다 ‘속을 균형 있게 파내는 일’이 훨씬 중요합니다. 이처럼 실용성을 갖춘 도자기는 단단하게 채운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비워낸 형태에서 시작됩니다.

2. 심리적 정화로서의 비움
도예를 하다 보면, 손에 쥔 흙에서 자연스럽게 중심을 잡고, 바닥을 만들고, 윗부분을 차츰 들어 올립니다. 하지만 일정 높이에 이르면 ‘안쪽을 파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이때 ‘비우지 않으면 무게중심이 틀어지고, 가마 속에서 깨질 가능성’도 높아지죠. 이는 마치 우리 마음과도 같습니다. 무언가를 계속 쌓기만 하면 무겁고 불안정해지고, 결국 스스로 버티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끔은 의도적으로 ‘내 안을 비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3. 미감(美感)으로서의 여백
동양 미술과 공예에서는 ‘여백의 미’가 중요한 가치로 여겨집니다. 도자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득 채운 그릇보다, 약간 덜 찬 그릇이 더 안정감 있게 보이고, 여유로운 인상을 줍니다. 특히 요즘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사회에서는 ‘비워낸 것’이 오히려 고급스럽고 깊은 감성을 전달합니다. 디자인적으로도 심플한 라인의 컵이나 무광 도자기 등은 ‘채움보다 덜어냄’이 주는 고요함을 담고 있습니다.

4. 현대인의 삶에 필요한 ‘비움의 시간’
일상에서도 우리는 무언가를 계속 채우며 살고 있습니다. 정보, 일정, 관계, 물건, 기대감… 그런데 채우기만 하는 삶은 결국 과부하가 오고, 스스로가 ‘무거운 그릇’이 되어버립니다. 도자기가 가마 속에서 터지지 않기 위해 일정한 두께와 공간을 유지하듯, 우리도 주기적으로 정리하고 덜어내야 진짜 중요한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도예의 ‘비워내기’는 단순한 제작 단계가 아니라, 삶의 기술이자 정신적 연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비워냄은 멈춤이 아니라 시작이다

흙을 만지는 사람들은 압니다. 비우는 건 포기가 아니라 준비라는 것을. 속을 비우는 그 순간, 비로소 무언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듯, 우리도 가끔은 내려놓고 멈춤으로써 더 넓은 가능성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도예는 채우기보다 ‘덜어내는 기술’입니다. 예쁘게 만드는 법보다, ‘무너뜨리지 않게 비우는 법’을 먼저 배우게 됩니다. 그 과정은 조용하지만, 깊고 묵직한 깨달음을 줍니다. 도자기가 완성되는 순간, 우리는 그 안에서 공허함이 아니라 ‘여유와 기능, 의미’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해하게 되죠. 가장 단단한 것은, 가장 잘 비워낸 그릇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도자기처럼 단순하고 비워진 형태로 돌아가야 할지 모릅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도, 잠시 비워낼 공간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