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현대 설치미술로 진화한 도자기 작품들: 공간을 채우는 흙의 언어

by 다정한스푼 2025. 7. 28.

 

공간을 채우는 흙의 언어

전통적인 그릇의 기능을 넘어, 도자기가 현대 설치미술의 주체로서 새로운 예술의 장을 넓히고 있다. 흙과 불로 빚어진 도자기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사회적 메시지와 철학을 담은 조형적 언어로 확장되었다. 이 글에서는 도자 예술이 현대 설치미술과 어떻게 결합하며, 공예와 순수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주요 작품 사례와 함께 도자의 조형미와 공간성이 어떻게 재해석되고 있는지를 소개한다.

흙이 공간을 점유하는 순간

도자기는 늘 작았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찻잔, 식탁 위를 채우는 그릇, 유리장 속의 화병. 우리는 도자기를 ‘작은 예술’로 불러왔고, 그것은 손에 닿는 예술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전시장 한가운데에 수백 개의 파편들이 흩어져 있는 걸 보았다. 마치 누군가의 삶이 산산조각 난 듯한 풍경이었다. 그 파편들 사이로 조심스레 걷다 보니, 문득 깨달았다. 도자기가 이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흙으로 시작된 물성이 가마의 불을 만나 완성된 후, 다시 작가의 사유를 통해 해체되고 재조립되며 ‘설치’라는 새로운 언어로 태어난다. 설치미술로서의 도자기는 단순히 형태의 확장을 넘어서, 시공간적 맥락을 관통한다. 그것은 더 이상 기능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관객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끌어내는 장치이자 질문이 된다. 이 글에서는 도자기가 어떻게 현대 설치미술의 일부로 진화했는지,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어떤 작가들이 주목받고 있는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흙은 여전히 유연하고, 그 유연함 덕분에 도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술의 경계를 넓히고 있다. 우리는 그 확장의 현장을 함께 걸으며, 도자의 또 다른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도예 작품 전시
전시된 작품

이미지 출처: ChatGPT 이미지 스타일 참조

도예에서 설치로: 경계를 넘어선 변주

첫째, 도자기는 공간과의 관계에서 새로운 조형성을 갖게 된다. 전통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지는 물건이었던 도자기가 이제는 바닥을 덮고, 벽을 타고 오르며, 천장에서 매달리기까지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일본 작가 나카무라 유타카의 《흙의 숲》이 있다. 수천 개의 도자기 조각이 바닥에 흩어져 숲의 이미지를 구성하며, 관객은 그 사이를 직접 걷는다. 도자기는 관객을 끌어들이고, 그 안에 머물게 한다.
둘째, 파편화된 도자기는 시간과 기억의 은유로 사용된다.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그대로 활용하거나, 일부러 파손시켜 재조합하는 설치 작품은 삶의 단절과 재생을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오브제를 넘어선 서사다. 한국의 박지은 작가는 《재, 그리고 다시》라는 설치작업에서 깨진 백자 조각들을 회화적으로 배치해, 역사적 단절과 치유의 과정을 시각화한다.
셋째, 도자기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매체로도 활용된다. 현대 설치미술에서 도자기는 환경, 젠더, 역사, 이주와 같은 이슈를 시각화하는 데 쓰인다. 예를 들어 미국 작가 더스타 바움가르트너는 일회용 컵의 형태를 흙으로 빚어 수천 개 설치함으로써 소비문화의 무의식적 반복을 비판한다. 이처럼 도자기는 일상의 오브제를 넘어, 사회를 말하는 방식으로 거듭난다.
넷째, 도자기 설치는 협업과 커뮤니티 기반 예술로도 확장되고 있다. 지역 주민과 함께 도자기 조각을 만들고 이를 함께 설치하는 공공예술 프로젝트가 세계 각지에서 진행 중이다. 한국의 한 도예 마을에서는 마을 주민 200명이 함께 만든 도자기 벽화가 지역 커뮤니티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이는 도예가 이제 작가 개인의 영역을 넘어, 공동체의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작은 흙덩이가 만든 커다란 질문

나는 종종, 가마 앞에 앉아있는 도예가를 떠올린다. 손에 묻은 흙, 기다림의 시간, 불의 흔적. 도자기는 늘 그렇게 조용히 만들어졌고, 조용히 사용되었다. 그러나 그 도자기가 어느 순간 전시장 한복판에서 사람을 멈춰 세우고,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나요?” “이 깨진 파편은 무엇을 닮았나요?” 설치미술로서의 도자기는 그 자체로 질문이다. 미술관 안에서, 거리 한복판에서, 혹은 오래된 폐공장 속에서 도자기는 더 이상 단지 기능을 지닌 물건이 아니라, 관계를 열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늘 사람을 향해 있다. 어쩌면 도자기는 이제 더 이상 ‘완성’을 추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깨지고 흩어지고 다시 엮이는 과정에서 그것은 더욱 살아난다. 나는 그 파편들 사이를 걸으며 생각한다. 도예가란 결국, 삶의 모양을 흙으로 적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우리는 도자기를 ‘그릇’이 아닌 ‘공간’으로, ‘장식’이 아닌 ‘대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작지만 단단한 존재로서, 예술의 무게를 다시 묻고 있다. 흙이 머문 자리, 그곳에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남긴다.